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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특별전

찍고 앰버김 2026. 3. 20.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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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24일부터 올해 2026년 1월 15일까지 부암동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천경자 특별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가 열렸다.
천경자 탄생 101주기, 작고 10주기를 맞은 특별기획전이다.
천경자(1924~2015)는 꽃과 여인, 이국적 풍경화 등 원시적이면서 세련된 그림으로 크게 사랑을 받았으나 치열하고 고독한 삶을 살았던 여류화가다.
이번 전시회 입장료는 성인 한명에 20,000원이다.

서울미술관
젊은 시절의 천경자 화백

천경자 화백은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군서 기였던 아버지 천성욱과 외할아버지 슬하 무남독녀였던 어머니 박운아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결혼 적령기이던 17세 때 혼담이 오가자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해 도쿄로 떠나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해 그림을 배웠다.
1944년 명문대 중퇴생 출신의 이철식과 결혼해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았으나 1946년 남편이 장결핵에 걸려 요절, 1948년 광주 모 신문 사회부 기자 출신 김남중을 만났고, 1954년 그와 서울에서 결혼식 대신 피로연을 열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김남중은 본처가 있었고 본처와 천경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천경자는 전 부인과 이혼할 때를 기다리면서도 끊이지 않는 여자문제로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이어가던 중 1950년대 초반 김남중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딸 김정희를 낳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교동 2층방에 엎드려서 초롱불과 백열전구 밑에서 아이를 포대기에 꽉 묶고 엎드려서 그렸다고 한다.



정 1955

1955년 종이에 그린 '정'은 초기작품의 특징인 가느다란 붓으로 세밀하게 윤곽을 그리고 그 안을 채색한 기법이 보인다.
색감이 화려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품에 안고 있는 고양이는 1950년대 당시 천경자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라고 한다.



하일(夏日) or 모기장 안의 쫑쫑이 1957

1957년 종이에 채색한 '모기장 안의 쫑쫑이'는 김남중과의 사이에 낳은 둘째이자 막내아들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의 모성이 가장 크게 나타난다.
김남중과의 결혼 생활 중 그의 잦은 외도와 본처와의 갈등, 임신과 이별 통보, 재결합이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천경자는 훗날 자서전에서 그와의 사랑을 "미친 듯이 사랑했고, 미친 듯이 괴로웠던 전설"이라 회상했다.



청춘의 문 1968

천경자 화가의 어릴 적 꿈은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20살에 데뷔, 아직 한창때인 36살에 은퇴해서 '신비로움'과 '고독'의 아이콘으로 남은 할리우드 여배우 그레타가르보 (1905~1990)를 좋아했다. 그녀를 그린 '청춘의 문'은 얼굴과 몸이 분리되어 시각적 충격(Impact)을 주는데, 이는 정신과 영혼이 담긴 얼굴과 육체와 현실을 반영하는 몸을 시각적으로 분리하는 현대적인 구성주의의 표현이다.
화가는 여배우의 서늘하고 우울한 표정을 보며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한(恨)'과 '고독'을 투영했다.



서사모아 아피아시 호텔에서 1969

종이에 유성펜으로 채색한 1969년작 '서사모아 아피아시 호텔'에서는 45세의 천경자가 생애 첫 해외여행으로 들떠서 잠을 못 이루고 호텔방에서 거울을 보며 거울에 비친 자화상을 그렸다.
그녀는 1969년 여권을 받아서 25년간 13번 해외여행을 했다.
남태평양 서사모아와 그 일대인 하와이, 타히티를 시작으로 이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를 여행했는데, 한 번에 4~8개월씩 머물면서 각 나라의 풍습을 세밀하게 관찰, 스케치를 남겨서 지구촌 다큐멘터리 역할을 했다.
이 무렵 천경자 화가는 김남중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세계 여행을 시작하고 자기만의 예술 세계에 침잠하면서 사실상 남남처럼 멀어진 것이다. 1987년에 김남중이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질긴 인연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다.



노천명 (1973)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 '사슴'으로 유명한 노천명(1912~1957)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간 유명한 시인이자 작가다.
1973년 이어령 작가가 '문학사상'이라는 잡지를 만들 때 천경자 화가가 표지모델로 '노천명'을 그렸고, 문화유산인 노천명의 귀한 손을 크게 그렸다.




팬지 1973

천경자 화가는 "내고항 고흥은 동네 미친 여자들이 머리에 꽃을 올리고 돌아다닌다."고 했다.
또한 "내 고통스러운 생애의 마디마디를 꽃으로 비유했다"라고 했다.
그녀의
그림에는 꽃을 머리에 얹은 여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화가에게 꽃은 슬픔과 고독을 숨기기 위한 역설적인 장치다. 꽃이 화려하면 할수록, 그 아래 놓인 여인의 공허하고 무표정한 눈빛은 더욱 깊은 고독(孤)을 드러낸다.
1973년에 그린 '팬지'는 36세에 요절한 할리우드 섹스심벌이었던 여배우 마를린 먼로(1926~1962)를 그렸다. '팬지'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이다.




고 (孤•1974) 종이에 채색, 38.5×23.3cm

1974년에 그린 '고孤'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이 작품은 자신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슬픔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나르시시스트'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다.
그림 속 그녀는 눈동자의 초점이 명확하지 않고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데, 세상과 소통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해 있는 고독한 상태다.
머리에 꽂은 화려한 꽃들과 어깨 위의 나비는 매우 생동감 넘치고 화려하지만, 얼굴은 창백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해 있는 고독한 상태,  '화려함 속의 고독'이다. 즉,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에 화가 자신이 평생 안고 살았던 지독한 고독을 형상화한 것이다.
"내 그림들은 내 생활의 기록이다. 내 슬픔, 내 기쁨, 내 고통... 내 모든 것이 그 속에 담겨 있다."
"내 그림은 모두 나의 분신"
이라고 했다.



길례언니 1982

노란 원피스에 하얀 챙모자를 쓴 '길례언니'는 1982년 종이에 채색한 작품이다.
길례언니는 천경자 화백이 어릴 적 길을 걷다가 다리가 아파서 우는데 자신을 업어줬던 예쁘게 생긴 언니로, 나중에 소록도에 간호원으로 갔다고 한다. 사실상 작가의 실제 어린 시절 기억과 상상력이 결합된 길례언니는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작가의 화풍에 따라 다양한 변주로 등장한다.



위작 논란의 '미인도'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회고전' 개막일 당시 천경자 화백
1998년 서울시에 작품 기증

1991년 '미인도'위작 사건으로 천경자 화가의 작품 세계는 사실상 끝을 향한다. 천경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한 '미인도'를 두고 "내 그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미술관은 진품이라고 반박했다. 작가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울부짖고, 국가는 "너의 자식이 맞다"라고 주장했던 아이러니한 사건인 것이다.

"이건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내 그림은 내가 제일 잘 압니다."

국가와 작가의 유례없는 정면충돌에 국립현대미술관은 화랑협회의 감정을 거쳐 "진품이 맞다"는 결론을 내린다.
작가는 1998년 작품 93점과 그 저작권을 모두 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절필을 선언한 후 두 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고, 2003년 뇌출혈 이후 거동이 불편한 채 지내다가 뉴욕에서 2015년 사망했다.
1999년 고서화 위조범 권 모 씨가 자기가 그렸다고 자백을 했고, 2016년 프랑스 감정단도 위작 판정을 내렸으나 검찰은 신빙성이 낮다며 진품 결론을 유지했다.

현재 천경자 화가의 그림은 호당 1억 원이 넘는 초고가로 남성중심에 추상화 일색의 한국화단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예술가에게 작품은 영혼과도 같다. 자신의 영혼이 담기지 않았다는 작가의 외침보다 과학적 수치나 행정적 절차가 우선시되었던 이 사건은 우리에게 **'예술의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씁쓸한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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